삼미 슈퍼스타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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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미 슈퍼스타즈는 1982년 창단된 한국 프로야구 원년 멤버로, 인천/경기/강원 지역을 연고지로 활동했다. 창단 첫 해에는 성적 부진과 감독 교체를 겪었으나, 1983년 재일동포 선수 장명부를 영입하며 반등을 시도했다. 장명부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팀 내 갈등과 부진으로 1984년 최하위로 떨어졌고, 1985년 청보식품에 매각되어 청보 핀토스로 팀명이 변경되었다. 주요 선수로는 장명부, 임호균 등이 있으며, 양승관, 정구선 등이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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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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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구단 이름 (영문) | Sammi Superstars |
구단명 | 삼미 슈퍼스타즈 |
회사명 | 주식회사 삼미슈퍼스타즈 |
소속 리그 | 한국프로야구 |
가맹 단체 | 한국야구위원회 |
설립 연도 | 1982년 2월 5일 |
해체 연도 | 1985년 6월 21일 |
연고지 | 인천, 경기, 강원 |
홈구장 | 숭의야구장 (1982년 ~ 1985년) |
제 2 경기장 | 의암야구장 (1982년 ~ 1985년) |
수용 인원 (인천) | 12,000명 |
수용 인원 (의암) | 10,000명 |
영구 결번 | 없음 |
마스코트 | 슈퍼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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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 |
리그 우승 횟수 | 0 |
리그 우승 | 없음 |
시리즈 우승 횟수 | 0 |
시리즈 우승 | 없음 |
시리즈 출장 횟수 | 0 |
시리즈 출장 | 없음 |
플레이오프 횟수 | 0 |
플레이오프 | 없음 |
2. 팀 역사
1982년 한국 프로 야구 출범과 함께 인천·경기·강원 지역을 연고로 창단되었다. 삼미그룹은 소비재 관련 계열사가 부족하여 야구단을 통한 홍보 효과를 얻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창단 첫해인 1982년에는 삼성 라이온즈와의 개막전에서 승리했지만, 이후 극심한 부진에 빠져 15승 65패(승률 0.188)라는 저조한 성적으로 최하위에 머물렀다. 시즌 중 박현식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자진 사퇴했고, 시즌 후에는 방출된 김동철 선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사건도 발생했다.
1983년에는 재일동포 선수 영입이 허용되면서[1] 투수 장명부를 영입하고 김진영 감독을 선임하는 등 대대적인 전력 보강을 단행했다. 장명부는 30승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며 팀의 돌풍을 이끌었고,[1] 팀은 전·후기 리그에서 모두 2위를 차지하며 강팀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감독과 코치 겸 선수가 시즌 중 구속되는 사건[1] 등으로 인해 아쉽게 한국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다.
1984년 시즌을 앞두고 전력 보강을 명분으로 주축 투수 임호균을 롯데로 트레이드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했고, 에이스 장명부마저 구단과의 보너스 지급 문제로 갈등을 겪으며 부진에 빠졌다. 결국 팀 성적은 다시 최하위로 추락하며 깊은 침체에 빠졌다.
1985년 시즌 초반, 개막전 승리 이후 18연패라는 KBO 역대 최다 연패 기록을 세우는 등 부진이 계속되자, 삼미그룹은 경영난 심화와 야구단을 통한 홍보 효과 미미[1][2] 등을 이유로 5월 1일 청보식품에 구단 매각을 발표했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6월 21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이후 청보 핀토스로 팀명이 변경되어 리그에 참여하게 되었다.
2. 1. 창단 배경 (1982년)
1982년 2월 5일 인천상공회의소에서 삼미 슈퍼스타즈가 창단되었다. 한국 프로야구 원년 6개 구단 중 하나로, 인천·경기·강원 지역을 연고지로 하여 출범했다. 당시 프로야구 출범에는 여러 재벌 기업들의 참여가 있었는데, 이는 프로 스포츠의 안정적인 성장과 대중적 인기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삼미그룹은 소비재 관련 계열사가 부족하여 야구단 운영을 통한 홍보나 시너지 효과를 얻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창단 첫해인 1982년, 삼성 라이온즈와의 데뷔 경기에서는 투수 인호봉의 호투와 양승관의 활약(3타수 2안타 2타점)에 힘입어 5:3으로 역사적인 첫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팀 성적은 급격히 부진했다. 전기 리그에서는 10승 30패(승률 0.250)를 기록했고, 후기 리그에서는 단 5승(35패)에 그치며 0.125라는 역대 기별 최저 승률을 기록했다. 결국 정규 시즌 최종 성적은 15승 65패, 승률 0.188로 6개 구단 중 최하위에 머물렀다. 특히 4월 25일 OB와의 경기에서는 8점 차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역전패를 당하는 등 불안정한 경기 운영을 보였고, 이틀 뒤 박현식 감독이 성적 부진에 책임을 지고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자진 사퇴하는 일도 있었다. 이후 이선덕 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았으나 팀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시즌 종료 후인 그해 12월 25일에는 팀 내 선수 11명을 대거 방출했으며, 이 과정에서 방출된 김동철 선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사건도 발생했다.
2. 2. 초기 성적 부진과 감독 교체 (1982년)
1982년 창단 첫해, 삼성 라이온즈와의 데뷔 경기에서 투수 인호봉의 호투와 양승관의 활약(3타수 2안타 2타점)에 힘입어 5:3으로 역사적인 첫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부진을 면치 못하며 전기 리그에서는 첫 승을 포함해 10승 30패를 기록했고, 후기 리그에서는 5승 35패(승률 0.125)라는 역대 최저 승률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결국 정규 시즌 성적은 15승 65패(승률 0.188)로 6개 구단 중 최하위에 머물렀다.특히 4월 25일 OB 베어스와의 경기에서는 8점 차로 앞서다가 충격적인 역전패를 당했고, 이틀 뒤인 4월 27일 박현식 감독이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했다. 이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감독이 자진 사퇴한 첫 번째 사례였다. 이후 이선덕 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았으나 팀의 부진은 계속되었다.
시즌이 끝난 후인 12월 25일, 삼미 구단은 대대적인 선수단 정리에 나서 팀 소속 선수 11명을 방출했다. 이 과정에서 방출 통보를 받은 선수 중 한 명인 김동철은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2. 3. 장명부 영입과 반등 (1983년)
KBO는 상위팀과 하위팀 간의 큰 격차를 줄이고 전력 균형을 맞추기 위해, 당초 1985년으로 예정되었던 재일동포 선수 영입 허용 시기를 1983년으로 앞당겼다.[1] 이에 따라 삼미 슈퍼스타즈는 재일동포 투수 장명부와 야수 이영구를 영입했다. 또한, 인천 야구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김진영을 감독으로 선임하고,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멤버인 임호균, 김진우, 정구선, 이선웅 등을 영입하며 팀을 거의 새로 창단하는 수준으로 보강했다.[1]특히 장명부는 계약금과 연봉을 합쳐 1.3억원에 부대비용 5000만원를 받아 '1억 원의 사나이'로 불리며 큰 주목을 받았다.[1] 그러나 시범경기에서는 그의 독특한 투구 폼과 느린 구속 때문에 "일본 프로야구의 퇴물을 너무 비싸게 영입했다"는 우려 섞인 평가가 많았다.[1] 하지만 장명부는 정규 시즌이 시작되자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는 삼미가 치른 100경기 중 60경기에 등판하여 30승(28선발승) 16패 6세이브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1] 또한, 한 시즌 최다 선발 등판(44경기), 최다 완투(36경기), 최다 이닝 투구(427⅓이닝), 최다 상대 타자(1,712명), 최다 실점(175점) 등 각종 기록을 새로 썼다.[1] 당시 코치였던 이재환은 장명부가 강력한 구위를 가진 투수는 아니었지만, "볼 스피드의 완급 조절과 제구력, 그리고 마운드 운영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고 평가했다.[1]
장명부와 임호균은 팀의 '원투 펀치'로서 도합 42승을 합작하며 팀 마운드를 이끌었다. 이해 삼미는 총 52승을 거두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미는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는데, 전기 리그와 후기 리그 모두 2위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전기 리그에서는 6월 6일 기준으로 우승까지 매직넘버 11을 남겨두며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나, 남은 12경기에서 3승 9패로 부진하며 해태 타이거즈에게 역전을 허용했다. 특히 6월 1일 MBC 청룡과의 경기에서 심판 판정에 격렬하게 항의하던 김진영 감독이 구속되는 사건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1] 후기 리그에서도 한때 선두를 달렸지만, 8월 22일 코치 겸 선수였던 백인천이 개인적인 문제로 구속되면서 팀 분위기가 가라앉았고, 결국 우승 문턱에서 좌절하며 다음 시즌을 기약해야 했다.[1]
2. 4. 장명부와의 갈등, 그리고 몰락 (1984년)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가 장명부의 활약으로 빛났다면, 1984년은 그 반대로 어둠이 짙게 드리운 해였다. 시즌 종료 후인 1983년 10월 27일, 삼미는 그해 12승을 거둔 투수 임호균을 롯데로 보내고, 박정후(투수), 김정수(1루수), 권두조(유격수), 우경하(외야수)를 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이는 "전력 강화를 위해서는 센터 라인을 보강해야 한다"는 장명부의 주장에 따른 결정이었다.구단 | 보내는 선수 | 받는 선수 |
---|---|---|
삼미 | 임호균 (투수, 1983년 12승) | 박정후 (투수), 김정수 (1루수), 권두조 (유격수), 우경하 (외야수) |
롯데 | 박정후, 김정수, 권두조, 우경하 | 임호균 |
삼미는 임호균의 공백을 박정후, 신태중, 정성만으로 메우려 했으나, 이 세 투수가 합작한 성적은 14승 27패에 그치며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설상가상으로 에이스 장명부는 구단이 30승 달성 시 약속했던 보너스 1억원을 지급하지 않자 이에 불만을 품고 태업성 플레이를 보였다. 결국 장명부의 성적은 13승 20패 7세이브로 크게 떨어졌다. 시즌 시작 전부터 내부 문제로 삐걱거린 삼미는 결국 1984년 전·후기 리그에서 모두 최하위를 기록하며 다시 한번 깊은 부진에 빠졌다.
2. 5. 청보 핀토스로 매각 (1985년)
1985년 시즌은 삼미 슈퍼스타즈에게 더욱 힘든 한 해였다. 3월 30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개막전에서 5-1로 승리하며 'Again 1983'을 기대하게 했으나, 이후 한 달 동안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18연패의 깊은 수렁에 빠졌다. 4월 30일, MBC 청룡을 상대로 최계훈이 4-0 완봉승을 거두면서 길었던 연패의 악몽에서 벗어났다. 이날 인천 도원구장은 마치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것 같은 분위기였다.그러나 연패 탈출의 기쁨도 잠시, 5월 1일 삼미그룹은 경영난을 이유로 청보식품에 구단을 700억원에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선수단은 전기리그까지 삼미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치르기로 했고, 6월 21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고별 무대가 되었다. 이 경기에서 6-16으로 크게 패하며 마지막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려던 소박한 희망마저 이루지 못했다.
삼미 슈퍼스타즈 매각의 가장 큰 원인은 1984년 7월부터 시작된 삼미그룹 주력 회사인 삼미 해운의 적자 누적 등 경영난과 팀의 성적 부진이었다. 또한, 소비재 분야 계열사가 없어 야구단을 통한 홍보 효과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 점도 큰 이유였다.[1] 삼미그룹은 1차로 삼미 해운을 정리한 데 이어, 1984년에는 그룹의 상징이었던 삼일빌딩마저 한국산업은행에 2900억원에 매각하는 등 심각한 재정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82년부터 1984년까지 3년간 45.1억원의 적자를 기록한 야구단을 계속 운영하기는 어려웠다. 소비재 계열사가 전무하여[2] 야구단 운영을 통한 홍보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던 삼미그룹의 특성상, 1985년 시즌 개막과 함께 이어진 연패는 그룹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었고, 이는 결국 구단 매각을 서두르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후 삼미 슈퍼스타즈는 청보 핀토스로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
3. 주요 기록
1982년 2월 5일 인천상공회의소에서 창단식을 가졌다. 첫 경기인 삼성 라이온즈전에서는 인호봉의 호투와 양승관의 활약으로 5:3으로 승리했지만, 이후 부진을 거듭했다. 전기 리그에서는 10승 30패(승률 0.250)를 기록했고, 후기 리그에서는 5승 35패(승률 0.125)로 역대 기별 최저 승률을 기록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15승 65패(승률 0.188)로 6개 구단 중 최하위였다. 특히 4월 25일 OB전에서는 8점 차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역전패했고, 이틀 뒤 박현식 감독이 프로야구 최초로 자진 사퇴했다. 이선덕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았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시즌 종료 후인 12월 25일, 삼미는 선수 11명을 방출했는데, 이 중 김동철은 방출 후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비극이 있었다.
KBO는 팀 간 전력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85년으로 예정되었던 재일동포 선수 영입을 1983년으로 앞당겼다. 이에 삼미는 재일동포 투수 장명부와 이영구를 영입하고, 김진영을 감독으로 선임했다. 또한 1982년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 우승 멤버인 임호균, 김진우, 정구선, 이선웅 등을 영입하며 팀 전력을 크게 강화했다.
장명부는 계약금과 연봉 합계 1.3억원, 부대비용 5000만원을 받아 ‘1억 원의 사나이’로 불렸다. 시범경기에서는 부진했지만, 정규 시즌에서는 100경기 중 60경기에 등판하여 30승(28선발승) 16패 6세이브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그는 한 시즌 최다 선발 등판(44), 최다 완투(36), 최다 이닝(427⅓), 최다 상대 타자(1,712) 기록을 세웠다. 당시 코치였던 이재환은 장명부가 뛰어난 완급 조절, 제구력, 마운드 운영 능력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장명부와 임호균은 도합 42승을 합작하며 팀의 52승을 이끌었다. 삼미는 전·후기 리그 모두 2위를 기록하며 돌풍을 일으켰으나, 한국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다. 전기 리그에서는 막판 12경기에서 3승 9패로 부진하며 해태에게 우승을 내주었고, 이는 6월 1일 MBC전에서 김진영 감독이 심판 판정 항의로 구속된 사건이 큰 영향을 미쳤다. 후기 리그에서도 선두를 달리던 중 8월 22일 백인천 코치 겸 선수가 개인적인 문제로 구속되면서 상승세가 꺾였다.
1984년 시즌을 앞두고 삼미는 임호균을 롯데로 보내고 박정후, 김정수, 권두조, 우경하를 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이는 센터 라인 강화를 주장한 장명부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으나, 임호균의 공백을 메우지 못했다. 또한 장명부는 구단이 30승 보너스 1억원 지급 약속을 지키지 않자 태업성 플레이를 보이며 13승 20패 7세이브로 부진했다. 팀 내부 문제까지 겹치면서 삼미는 전·후기 리그 모두 최하위(6위)로 추락했다.
1985년 시즌은 더욱 암울했다. 3월 30일 롯데와의 개막전에서 승리한 후 18연패에 빠졌다. 4월 30일 MBC를 상대로 최계훈이 완봉승을 거두며 길었던 연패에서 벗어났지만, 다음 날인 5월 1일 삼미그룹은 경영난을 이유로 구단을 청보에 70억원에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삼미는 전기 리그까지만 팀을 운영하기로 했고, 6월 21일 롯데전(6-16 패배)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구단 매각의 주된 원인은 1984년 7월부터 시작된 모기업 삼미그룹의 경영난(주력 회사 삼미 해운의 적자 누적, 삼일빌딩 매각 등)과 팀의 성적 부진이었다. 특히 소비재 관련 계열사가 없어[1][2] 야구단 운영을 통한 홍보 효과를 누리기 어려웠고, 1982년부터 1984년까지 누적된 45.1억원의 적자, 1985년 시즌 초반의 연패로 인한 그룹 이미지 실추 등이 매각 결정을 앞당겼다. 이후 팀은 청보 핀토스로 재창단되었다.
연도 | 구분 | 순위 | 경기 | 승 | 패 | 무 | 승률 |
---|---|---|---|---|---|---|---|
1982년 | 전기 리그 | 6위 | 40 | 10 | 30 | 0 | 0.250 |
후기 리그 | 6위 | 40 | 5 | 35 | 0 | 0.125 | |
통합 | 6위 | 80 | 15 | 65 | 0 | 0.188 | |
1983년 | 전기 리그 | 2위 | 50 | 27 | 23 | 0 | 0.540 |
후기 리그 | 2위 | 50 | 25 | 24 | 1 | 0.510 | |
통합 | 2위 | 100 | 52 | 47 | 1 | 0.525 | |
1984년 | 전기 리그 | 6위 | 50 | 18 | 30 | 2 | 0.375 |
후기 리그 | 6위 | 50 | 20 | 29 | 1 | 0.375 | |
통합 | 6위 | 100 | 38 | 59 | 3 | 0.392 | |
1985년 | 전기 리그 (매각 시점) | 6위 | 55 | 15 | 40 | 0 | 0.273 |
(시즌 중 청보 핀토스에 매각) |
4. 선수단
삼미 슈퍼스타즈의 선수단은 창단 초기 선수 수급의 어려움으로 전력이 불안정했다. 초대 감독 박현식은 1982년 시즌 초 성적 부진으로 KBO 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자진 사퇴했으며,[1][2] 이후 이선덕 코치가 잠시 감독 대행을 맡았다.[1]
1983년에는 김진영 감독이 부임하며 선수단 구성에 변화를 주었다. 특히 재일동포 투수 장명부와 1982년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 우승 멤버 임호균을 영입하여 강력한 선발진을 구축했고, 장명부는 해당 시즌 30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 외에도 인호봉, 양승관 등 창단 멤버와 1982년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 우승 멤버 정구선, 재일동포 선수 이영구 등이 선수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4. 1. 역대 감독
1982년 창단 감독은 박현식이었으나, 전기 리그에서 극심한 부진을 겪었다. 특히 4월 25일 OB와의 경기에서 8점 차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역전패를 당한 후 이틀 뒤 자진 사퇴했다. 이는 KBO 리그 역사상 최초의 감독 자진 사퇴였다.[1][2] 박현식 감독의 사퇴 후에는 이선덕 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았으나 팀의 부진은 계속되었다.[1]1983년 시즌을 앞두고 삼미는 대대적인 선수단 개편과 함께 인천 야구의 대부로 불리던 김진영을 2대 감독으로 영입했다. 김진영 감독 체제 하에서 삼미는 장명부, 임호균 등 강력한 선수들을 영입하며 전력이 크게 향상되었으나, 1983년 시즌 중 김진영 감독이 심판 판정에 항의하다 구속되는 사건 등이 발생하며 우승에는 실패했다. 김진영 감독은 1985년 팀이 청보 핀토스로 매각되기 전까지 감독직을 유지했다.
4. 2. 주요 선수
- '''투수'''
- * 장명부: 1983년 영입된 재일동포 에이스 투수. '1억 원의 사나이'로 불렸으며, 1983년 한 해 60경기에 등판하여 30승(28선발승) 16패 6세이브, 427⅓이닝 투구라는 기록을 세웠다. 1984년에는 부진했으며, 1983년부터 1985년 팀 해체 전까지 활동했다.
- * 임호균: 1982년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 우승 멤버 출신으로, 1983년 장명부와 함께 '원투 펀치'를 이루며 42승을 합작했다. 시즌 후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었다.
- * 인호봉: 1982년 팀 창단 첫 경기였던 삼성 라이온즈전에서 호투하여 역사적인 첫 승리를 이끌었다.
- * 오문현: 1982년 활동.
- * 정은배: 1985년 활동.
- * 최계훈: 1984년부터 활동했으며, 1985년 4월 30일 MBC 청룡을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며 팀의 18연패를 끊었다.
- * 김재현: 1982년, 1983년 활동.
5. 수상
(내용 없음)
5. 1. 골든글러브
5. 2. 개인 기록 (투수 부문)
1983년, KBO는 전력 불균형 해소를 위해 재일동포 선수 영입을 예정보다 앞당겨 시행했다. 이에 따라 삼미 슈퍼스타즈는 장명부를 영입했다. 계약금과 연봉을 합쳐 1.3억원에 부대비용 5000만원을 받은 장명부는 ‘1억 원의 사나이’로 불렸으나, 시범경기에서의 모습 때문에 "일본 프로야구의 퇴물을 비싸게 사왔다"는 우려 섞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그러나 정규 시즌이 시작되자 장명부는 압도적인 활약을 펼쳤다. 1983년 한 해 동안 팀이 치른 100경기 중 60경기에 등판하여 30승 (28선발승) 16패 6세이브를 기록하며 다승왕에 올랐다. 이는 KBO 리그 단일 시즌 최다승 기록으로 남아있다. 또한 220탈삼진을 기록하며 최다 탈삼진 타이틀도 차지했다.
이 외에도 최다 선발 등판(44), 최다 완투(36), 최다 이닝 투구(427⅓), 최다 타자 상대(1,712) 등 각종 투수 부문 기록을 세웠다. 당시 코치였던 이재환은 장명부의 구위 자체보다는 "볼 스피드의 완급 조절과 제구력, 그리고 마운드 운영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고 평가했다.
6. 관련 팀
참조
[1]
뉴스
프로야구 새 등식 ‘kt 위즈=승리 자판기’
http://www.sisajourn[...]
시사저널
2015-05-14
[2]
뉴스
프로야구 새 등식 ‘kt 위즈=승리 자판기’
http://www.sisajourn[...]
시사저널
2015-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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